2016년 11월 29일 화요일

성경속 어머니 (5) - 모세의 유모이면서 친 어머니 요게벳

모세가 태어난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물에 던지라고 명령을 했을 정도 였습니다.
레위집안의 혈통을 가진 아므람과 요게벳에게도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부모가 그러듯이 나의 아기는 귀한 존재라 생각합니다.
특히 믿음의 혈통의 가정인 이부부에게 아기는 더욱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기를 원했을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에 역청을 발라 물이 새어들지 않게  아기를 눕히고 강가의 큰 풀들사이에 놓고 누나인 미리암이 무슨일이 생길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강물로 떠나 보내기전 모세의 어머니의 심정


그때 마침 바로왕의 딸이 목욕을 하다가 이 아기 상자를 발견합니다.
상자안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보자 바로왕의 딸 공주는 아기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공주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다가가서 유모가 될만한 여인을 데려 오겠다고 말하며 요게벳을 소개시킵니다.

공주는 요게벳에게 돈을 주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요게벳 집에서 말입니다.

이 모든것이 잘 맞아 떨어지는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요게벳의 마음이 어떨것인지
이곳에 글로서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 엄마들은 모두 같은 생각일것입니다.

모세가 젖을 떼고 궁으로 들어가 살면서 공주는 그제야 이름을 '모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궁에서 살면서 이집트 사람이 자기와 같은 백성인 히브리 사람을 모질게 때리는 것을 보고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궁으로 부터 탈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이 생긴 이유는 유모라 칭했지만 친엄마의 품안에서 젖을 먹으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궁에서 더 좋은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한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성장하여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이시대의 우리의 자녀들이
엄마의 품안에서 배웠던 자기 정체성-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말고 살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2016년 11월 27일 일요일

성경속 어머니 (4) 리브가 - 선택의 기로에 선 쌍둥이의 어머니

창세기 24장을 읽으면 리브가가 어떻게 이삭의 아내(아브라함의 며느리) 가 되는 과정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보고  이삭의 아내로 결정한후 아브라함에게 빨리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이결혼이 여호와 께서 하시는일이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몇일을 더 함께 있기를 원하며 리브가에게 묻습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곧바로 떠날것을 결심합니다.
리브가는 낯설고 먼길을 선뜻 따라갈 만큼 결단력이 빠른 여인인것 같습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천만백성의 어미가 되어라..." 라고 축복하며 먼길을 떠나 보냅니다.

이삭과 결혼후 20년이 지나서야  간절한 기도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뱃속의 아기들의 움직임이 심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게서 말씀하십니다. "두 나라가 네 몸안에 있다.... 형이 동생을 섬길것이다."
리브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리브가는 에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고 늘 근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 시력이 좋지 못한것을 이용하여 쌍둥이 어머니인 리브가는 장자의 축복을 에서 대신에 야곱이 받도록 도와 줍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다가 들통이나면 오히려 저주를 받을것을 두려워 할때 리브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 저주는 내가 받으마..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라.."

하나님 말씀대로 하라고 가르치기 보다 자신을 말대로 하라고 하면서 이삭을 속이도록 도와 줍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잘못된 빠른 결단력으로 가족간의 비극이 시작되고,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곁에 두지도 못하고, 야곱은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면 자신이 이정도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전에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했던것 처럼, 리브가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리브가의 실수가 아니었고 끝까지 약속을 기다렸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야곱을 12지파의 아비로 만드셨을까 궁금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리브가의 실수를 조장하여 야곱을 12지파의 아비로 만드신것일까요?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역활을 감당하면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로서,가족들의 사랑을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베풀기를 원합니다.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나의 방법을 진행하지 않도록 끝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성경속 어머니 (3) 하갈 - 아브라함의 첩(?)

하갈은 사래의 여종입니다. (사라라고 불리어지기 전의 일입니다.)

사래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이후 하갈과 사래의 심리전으로 하갈이 도망가는길에 여호와의 천사를 만납니다. (아가페 쉬운성경 창세기 16:8-9)

여호와의 천사: "사래의 여종 하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길이냐?"
하갈 :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치는 길입니다"
여호와의 천사: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의 말을 잘들어라....아들을 낳으면 그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이는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이후 성경은 하갈이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아들 이스마엘을 위해서 사래의 몸종으로서 열심히 일했을것입니다.

13년이 지나고, 천사가 다시 아브람과 사래에게 나타나 많은 자손을 약속하면서  이름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었습니다.

그후에 사라는 정말로 이삭이라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이스마엘과 같이 있는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로 내쫒김을 당하게 됩니다.

이 두 모자는 광야에서 아브라함이 챙겨준 물도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광야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때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하나님께서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어셨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게 하시어 우물을 발견하고 아이에게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어있습니다.  "그아이가 자라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아이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살았고 휼륭한 활잡이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1:14-21)

광야에서 하갈이 혼자이었다면 과연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엄마이기에 강해야 합니다. 사람이 잘못 결정해서 생긴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하갈의 울부짖는 소리를 두번이나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주신것 처럼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돌아봅니다.



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성경속 어머니 (2) 사라 - 여러민족의 어머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많은 시간을 기다려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하갈이라는 하녀를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어 사라는 약속의 아들 , 이삭을 낳고 드디어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무나 바랄수 없는 일입니다.  

귀하게 태어난 이삭과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모두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는 이들이 함께 있는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것을 요청합니다. (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격의 번역에 따라서  희롱했거나, 같이 놀앗거나. 그외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어머니 사라는 이삭을 하나님의 확실한 상속자로 만든것 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여 이스마엘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기 위해 올바른 판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이사건에 대해 사라의 의견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반항하지 않았을까요?


사라는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믿고 기꺼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것을 결심했을 것 입니다.

2016년 11월 21일 월요일

성경속 어머니 (1) 하와 - 최초의 여인, 모든 산자의 어미

살아오면서 많은 호칭을 가지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엄마' 하는 호칭은 참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의 존재감을 알게해 줍니다.

성경(아가페쉬운성경)에 나오는 엄마들은 어떻했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저는 성경학자는 아닙니다.
제가 묵상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엄마의 역활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스토리 전개상 간략하게 적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그를 도울 짝을 만들어 줄것이다"(창세기 2:18)
그때까지는 이름이 없이 그냥 여인,여자로 불려집니다.
간사한 뱀은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가 보니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스럽고, 아름답게 보였으며, 사람을 지혜롭개 해줄것 같이 보였기에 그여자는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줍니다.

하와는 호기심과 세상의 열정이 많아 마음먹은것은 꼭 하고야 마는 진취적인 여인이었나 봅니다.

이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고 열심히 일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하와 (or Eve) '라는 이름으로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심으로 내가 남자의 아이를 얻었다" (아가페 쉬운성경 창세기 4:1) 그리고 아벨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비극의 사건이 벌어지고 가인마저 부모의 곁을 떠납니다.

성경은 하와의 심정에 대해 적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격어야할 비통한 감정은 모두 같을것입니다.

그이후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 '셋'이라는 아들을 낳은후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대신에 다른 아기를 주었다"

인류의 원죄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모든 생명을 가진 어머니이었습니다.


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그대, 느려도 좋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기다림이다.
...
...
좋은 것은 기다림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은 더 긴 기다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

"그대, 느려도 좋다" 중에서
(두란노, 저자-이규현 목사 : 부산 수영로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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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다 뒤쳐져 살고 있는 내모습을 보며 좌절감이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삶을 포기 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합니다.

'빨리 빨리','조금만 더, 더~~' 

빠른것에 승부를 거는 요즈음.
그리움이나 기다림이란 단어는 이제 무능력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본래 한민족은 기다림의 민족이라네요.
고추장,된장,간장,곰국.짱아찌......

오랜시간을 삭혀야 맛이 나듯이.

지금의 환경속에 내 마음을 삭히는 중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인정하며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는 중 입니다.

속도를 늦추었더니 그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입니다.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나를 잊어 주세요.



내가 죽은후 나의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분주했을 시절에는...
나의 시간을 가지는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독립해서 나가고..
나에게 남은것은 시간밖에 없습니다..

안보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도 있는데..

(Out of Sight, Out of Mind..)
설마 가족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족도 자주 안보니 궁금함도 점점 줄어드네요..

그저 같은 하늘아래에서 잘지내고 있겠지... 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도 가끔 내가 생각나면,
나에대한 좋은것만 기억해 주길 바래요...
그렇지만..
부디..나에대한 연민과 미안함을 떨쳐버리고 ..
주어진 세상에서 담대히 살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훗날.. 그들도 내가 느끼고 있는 지금의 순간들을 경험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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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문화가 성행하면서 요즈음 아이들이 가족(식구-食口)  에 대한 개념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포스팅합니다.



2016년 11월 17일 목요일

BLT 샌드위치 만들기










먹을때 베이컨이 흩어지지 않아서 더욱 고소한 BLT 샌드위치를 즐길수 있어요..

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버틸수 있으면 "한계"가 아니라네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던 시.. 홀로서기...
포스팅을 하면서 지난 3년전 시인의 사건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글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다... 제명해야 한다... 문학을 망쳤다...등 많은 말을 하지만..
그의 시에서 말했듯이 그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며 지루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얼마전 '구가의 서' 라는 드라마를 인터넷을 통해 보면서.. 악역을 담당했던 남자 배우가 죽으면서 하는말이 생각납니다.
"내 삶이 지루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우리는 남은자 "Remnant"로 살아있습니다. 버틸수 있을때 까지 버텨보려고 합니다.
고통속에 괴로워 하는 다른 Remnant들을 비판없이 수용하면서 그렇게 버텨보려고 합니다.

홀로서기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 졌다면

홀로 선다는 것은 가슴을 치며 우는것 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때
나는 또 다시 쓰러져 있었다...

지우고 싶다.
이 표정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속으로
깊은 수렁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속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우며 체념할 수 밖에....

위태 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선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 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진실한 결론은
<이번에는>
<이번에는>하며 여겨 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수 있었다.

나는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세우며
<홀로서기>를 익혀야 한다.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디엔가
홀로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수는 없지만
<이것이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